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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예총 놀이패 신명, 피·땀·눈물로 일군 삶의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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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3회 작성일 22-09-14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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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이 만난 사람] 신명 창단, 마당극 1세대 배우 윤만식 씨
`신명 40년 기억으로 살아나는 아카이브전’ 30일까지

40여 년 간 광주지역 마당극 굿판 등에서 민중문화운동을 이끌었던 윤만식 씨. 그가 40년 전 창단한 `놀이패 신명’이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 40년이란 세월 동안 풍파가 만만치 않았을 터, 오늘도 윤만식 씨는 삶의 전부인 신명이 흔들리지 않도록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토록 지키고 싶은 `신명’이 탄생하게 된 계기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사연이 절절하다. 본보는 최근 윤 씨를 만나 극단 신명史를 기록했다.

1977년 윤만식 씨가 군 복무를 마치고 서울에 있는 극단 `한두레’에서 봉산탈춤을 배운 후 단순한 서클활동이 아닌 문화운동을 하기 위해 전남대와 조선대에 탈춤반을 만들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로 유신 독재가 무너지면서 반독재 인사들과 대학생들이 석방되고 수배가 해제됐는데, 당시 수배 해제된 김선출, 김윤기 씨가 대학으로 돌아오면서 마당극 운동의 발전을 위한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됐다. 1980년 1월 전남대 `민속문화연구회’와 `전대극회’를 중심으로 전남대 국악반과 조선대 탈춤반의 일부 회원이 결합하여 광주·전남 지역 최초의 마당극 단체이자 사회문화운동을 표방한 문화운동 단체인 극회 `광대’를 결성했다.

신명과 토박이 모두 극회 광대에 뿌리

광주·전남지역 마당극 1세대들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

 “1980년 3월 창단공연으로 `돼지풀이’를 마치고 다음 작품으로 황석영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한씨연대기’를 준비하던 중 5·18을 맞게 됐다. 당시 시민궐기대회에서 대중연설을 하고 홍보작업을 하면서 광대 회원들은 `5월문화항쟁’에 투신했고, 5·18 이후 사망하거나 구속·수배당하는 처지가 됐다.”

극회 광대는 이 같은 시련 속에서 1981년 5월, 제2회 공연이자 광주민주화운동 1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인 `호랑이 놀이’를 끝으로 해체됐다.

이후 윤 씨는 침체돼있는 광주의 운동권을 되살릴 수 있도록 놀이패 극단을 만들기로 다짐했다.

윤 씨는 “문화예술이라는 장르를 빌려 무진교회 문화팀을 흡수해 팀을 꾸렸는데 당시 10여 명이 구성원 전부였고 그렇게 놀이패 신명이 탄생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극회 `광대’가 해체되고 만든 놀이패 신명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후 5·18민주화운동 당시 홍보부장을 맡았던 박효선 씨가 도피 중 풀려나면서 1983년 극단 `토박이’도 윤만식 씨와 함께 창단했다. 마당극을 전문으로 하는 `놀이패 신명’과 무대극을 전문으로 하는 `극단 토박이’. 이 두 곳 모두 광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이후 미술패, 노래패 등 문화운동 팀들이 생겨났고 진보적인 문화예술 활동을 하는 장르를 모두 수합해 만든 게 민중문화연구회”라면서 “꾸준히 활동을 하다가 1987년 6·29 민주화 선언 이후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민중문화연구회가 해체, 발전, 확대해 만든 게 광주전남민중문화운동협의회로, 당시 운영위원장을 맡아 운영을 했다”고 설명했다. 

물론 집안의 반대도 있었다. 신명과 문화운동, 이 모든 걸 지키기 위해 애써왔지만, 경제적 수입이 문제였다.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고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전문음식점을 개업했다. 그 공간을 5·18 관련 공연과 전시를 하고 학생운동권이나 진보 쪽의 어르신들의 사랑방 역할까지 하며 3년간 운영해왔다. 수익금을 가지고 신명 후배들에게 지원까지 하며 그가 지켜야 할 것들을 지켜내고야 만다.

전통탈·마당극용 창작탈 등도 직접 제작 윤 씨는 공연 연출뿐만 아니라 공연에 쓰이는 탈도 직접 제작한다. 우리나라의 오랜 전통으로 이어온 전통탈, 마당극에서 사용하는 창작탈 두 가지를 주로 만들고 전시를 하고 있다. 지역마다 쓰이는 재료가 다르고 캐릭터의 성격에 따라 모두 다르다고.

 “전통탈은 보통 그대로 만들지만, 마당극을 할 때 쓰이는 창작탈은 캐릭터에 맞게 유심히 관찰하고 상상도 하면서 형상화하는 작업을 한다. 여러 캐릭터에 맞는 탈을 만들어 놓으면 배우들이 대본에 맞는 탈을 가져다 쓰는데 배우의 성격에 맞지 않다면 무용지물 되곤 한다.”

탈과 탈을 쓴 배우 모두 내 자식처럼 느껴진다는 윤 씨. 보고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을 만큼 뿌듯하고 내 인생을 투영한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고. 그가 현재까지 만든 탈은 500여 개. 한 번씩 전시회를 열기도 하고 전시회를 열기 전 1년 정도 작업에 들어간다.

올해 신명은 창립 40주년을 맞아 동구 오월미술관에서 지역 마당극운동 40년의 시간을 만나볼 수 있는 기념 전시 `신명 40년 기억으로 살아나는 아카이브전’을 열고 있다. 그동안의 지역 마당극운동 40년을 망라하는 공연 연보, 각종 공연 포스터, 활동을 알 수 있는 자료 등이 전시됐는데, 여기에 윤 씨의 탈도 함께 자리잡고 있다.

윤 씨는 “그동안 만든 탈 일부가 전시됐는데 아카이브전이어서 소량만 전시돼 아쉽긴 하지만 이렇게 전시된 탈을 보고 있으니 뿌듯하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최근 40주년 기념공연에선 40년 전 맡았던 배역을 다시 맡아 열연을 펼치기도 했다.

 “40년 전 광대라는 작품에 형사로 등장하여 독립군들을 잡아와 물고문을 시키는 역할을 맡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인상이 강해서 주인공을 못하고 매번 악역만 맡아 공연을 하게 됐다. 40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르기 위해 대사를 외우느라 엄청 고생도 하고 힘들었다. 분량이 좀 있어서 순서에 맞게 맞추느라 힘들었지만 40주년인 만큼 열심히 했다.”

그는 “이번이 생에 마지막 무대”라고 말한다. 앞으로는 시나리오를 쓰는 게 목표라고.

 “후원회 조직 앞으로 100년 갈 기반 마련”

전남대 축산과를 졸업한 윤 씨는 지난 2011년 장성으로 잠깐 귀농을 했지만, 광주민회총이 침체되면서 사실상 개점 휴업 상태인 공간이 되어 장성에서 광주로 출퇴근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 광주로 이사와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는데, 지금도 귀농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윤 씨는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공기 좋은 곳에서 거주하면서 탈도 만들고 시나리오 대본도 쓰고 수익을 생각한 농업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싶다”면서 “건강도 생각하면서 기회가 된다면 꼭 그렇게 남은 생을 살아가고 싶다”고 바랐다.

이어 “신명은 30대 초반부터 70대 초반까지 40년간 지켜내고 보듬어온 내 삶의 전부”라면서 “다른 사업도 많이 해봤지만 망하기도 하고 사기도 당하고 나에게 남는 건 오직 신명뿐이다”며 애정을 드러냈다. 또 “현재 놀이패 신명은 경제적으로 너무 열악하다 보니 대표 포함 직원이 4명뿐이다. 작품을 같이 했던 이들도 다 나가고 객원으로 들어와 회당 공연비를 지불하며 이어갈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라면서 “최소한 작품 하나 만들 수 있는 규모를 갖춰야 할 것 같다”며 우려했다.

윤 씨는 “이번에 후원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는데 활성화돼 앞으로는 최저 생계비라도 받고 운영할 수 있는 팀이 되어서 40년이 아닌 50년, 100년까지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놀이패 신명이 됐으면 하는 게 바람이다”고 전했다.

한편, 신명 40주년 공연은 끝났지만 오는 30일까지 두 달 동안 동구 오월미술관에서 신명의 지역 마당극운동 40년의 시간을 만나볼 수 있는 기념 전시 `신명 40년 기억으로 살아나는 아카이브전’에서 윤만식 씨의 세월이 묻은 탈을 만나볼 수 있다.

출처 : https://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618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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