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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특별기고]지명, 그 속에 담긴 역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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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6회 작성일 23-04-12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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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열 대동문화재단 대표이사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는 개성이 왕도로서 수명이 다했다고 여겼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 정도전과 하륜, 무학대사 등 풍수 대가와 신료들의 의견을 수렴해 오늘날의 서울인 한양을 도읍지로 정했다. 한양의 인문 지리적 측면, 경제 군사적 이점, 효율적인 국토 이용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였다.

당시 한양은 풍수 전문가들이 500년 정도의 생명력을 지녔다고 평가했고, 민간에서도 한양 땅의 주인은 목자(木子)의 성을 가진 이씨(李氏)가 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1394년 10월, 새 왕조는 개성에서 한양으로의 천도를 단행했다. 도성은 한양의 자연지세를 이용해 주산인 백악산(북),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동),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서), 안산에 해당하는 목멱산(남산)을 연결하는 17㎞에 달하는 길이였다.

이로부터 한양은 단순히 국토의 중앙이 아니라 조선 역사의 최중심 무대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양(漢陽)이란 말은 ‘한강의 북쪽 햇볕 드는 땅’이란 뜻이다.

‘서울’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삼국시대 신라의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이라 했고, 이후 ‘서벌’이라 했던 것이 오늘날의 서울이라는 말로 변하게 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왕십리(往十里)에 관한 전설도 흥미롭다.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하려고 지금의 왕십리 부근에서 지형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한 늙은이가 소를 타고 지나가다가 채찍으로 소를 때리면서 “이랴! 이 소가 미련하기는 꼭 무학과 같구나, 바른 곳을 두고 엉뚱한 곳을 보다니...”

깜짝 놀란 무학이 그 노인을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 여겨 정중하게 도읍지의 자리를 물었더니, 노인은 채찍으로 서북쪽을 가리키며 십리(十里)를 더 가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갈왕(往), 왕십리라는 이름이 생겨났고, 지금의 경복궁 자리도 정해졌다고 한다. 그 노인은 도선국사가 현신한 것이라고 전한다.

용산구 이태원을 보자. 이태원이라는 지명은 옛날 역원제(驛院制)에서 유래한다. 역(驛)은 파발이나 관리에게 말을 대여해주는 시설이고, 원(院)은 관리와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시설을 말한다.

이태원은 지금의 용산고 정문 근처에 있었던 역원으로 한양에서 영남대로를 향해가는 첫 번째 원의 이름이었다. 서쪽의 홍제원, 동쪽의 보제원, 남쪽으로는 이태원과 인덕원이 있었다. 경기도 장호원과 남양주의 퇴계원, 충남 조치원, 황해도 사리원, 전라도 고막원 등은 역원의 기능이 사라지고 거리의 이름으로만 남아있는 것이다.

역은 역참(驛站)이라고도 했는데, 오늘날 역(驛)으로 바뀌었다. 역참에는 관리와 역마를 두고 공무(公務)로 장거리를 가는 관리에게 말을 갈아타게 했다. 역참은 30리 내외, 원(院)은 50리 거리에 설치했다. 이때 역참과 역참의 사이를 ‘한참’이라 했다. 역마를 갈아타던 두 지점 사이의 거리를 이르던 말이 한참(1참)이고, 거리는 30리, 12km의 긴 거리다.

이태원이란 명칭은 조선 초기에는 오얏나무 이(李)자를 써서 이태원(李泰院), 임진란 이후 왜군들과의 혼혈인들이 거주한 곳이라 해서 이태원(異胎院), 귀화한 외국인들이 거주했다해 이타인(異他人)으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 효종 때 이태원(李泰院)이라 쓴 것이 오늘날의 이름이다.

한강과 가까운 용산 이태원은 군사적 요충지로 부대가 주둔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이태원의 첫 번째 비극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들어와 주둔하면서부터 시작된다. 1592년 부산포를 통해 한양으로 밀고 올라온 왜군은 경쟁적으로 진격, 소서행장은 흥인지문(동대문)으로, 가등청정 부대는 숭례문(남대문)으로 입성을 한다.

이때 한양에 입성한 가등청정 부대는 용산에 주둔을 했다. 당시 이 근처 황학골에는 여승들이 수도하는 운종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왜군들은 여승들을 겁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전쟁이 끝나자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온 조선 여인들과 왜란 중에 왜군들에 의해 태어난 아이들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했다. 조정에서는 이곳에 보육원을 지어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기르게 했으니, 그때부터 이곳을 이태원(異胎院)이라고 부르게 됐던 것이다. 일종의 이방인 공동체 지역으로 만든 곳이 이태원이다.

이후 병자호란 때에도 만주로 끌려갔다 돌아온 조선의 여인 환향녀(還鄕女)들과 그 자식들까지 상당수가 이태원으로 흘러들어오게 된다.

또 한 말에는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온 청나라 군사가 이곳에 주둔을 하고, 1910년부터 해방 때까지는 일본군 사령부가, 광복 후에는 미군이 주둔하는 등 강대국들이 돌아가면서 점령한 한국 내 이방인의 땅으로 수난의 역사를 지닌 곳이다.

지난해 10월 말. 이태원 해밀턴호텔 골목에는 미국서 들어 온 핼러윈 축제를 즐기려고 10만여 인파가 몰렸고, 이로 인해 158명이 압사당하는 비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온 나라가 충격과 고통의 나락에 빠졌다. 사고 발생 두 달이 넘고 새해를 맞이했지만, 아직껏 사고에 대한 책임지는 자가 없는 나라가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치권에 대한 분개와 부끄러움에 절망감마저 든다. 다시 한 번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들에게는 용기와 희망의 새해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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