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그의 춤은 직설적이다.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군더더기가 없다. 말로는 누군가 상처를 받을까 싶어 몸을 사리지만, 플로어 위에선 그렇지 않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여과없이 몸의 언어로 드러낸다. 세 아들을 키운 엄마로 모성애에 대해 펼쳐놓았고, 지역의 춤꾼으로서는 제자들과 함께 80년 5월 광주로 춤판을 벌였다. 거친 동작들로 온 몸은 땀과 멍으로 물드나, 이렇게 한껏 세상을 향한 메시지를 풀어내고 보면, “아, 이 맛에 춤 추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고.
무더웠던 여름의 한 낮, 실용무용가 박정옥씨(송원대 공연예술학과 교수)를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그의 첫 춤은 발레였다. 초등학교 특별활동 시간에 처음 접했는데 꽤 소질을 보였다. 학교 대표로 콩쿠르에 나가 상도 여러 번 받았다. 무엇보다 그는 춤이 너무 좋았다 한다. “정말 좋았어요” 덧붙이는 말에 번지는 미소가 그의 진심을 대신한다.
“평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그리 예뻐 보이지 않는데, 유독 춤을 추면서 본 저는 정말 예뻐 보이는 거예요. 크나큰 홀을 누비면서 마음껏 몸을 움직이는 게 좋았습니다. 당시 제 춤에 무언가 ‘소신’을 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저 몸을 쓰는 행위 자체에 홀딱 반했죠. 평생 춤을 추면서 살고 싶다고 소원했던 때이니까요.”
허나 그 소원은 이뤄질듯 하면서 자꾸만 그의 인생을 흔들었다. 우선 춤을 전공하는데 있어 아버지의 반대가 워낙 심했다. 그래서 그가 춤을 전문적으로 배우게 된 것은 고등학교 3학년이 돼서였다. 반대에도 불구, 완강한 딸의 모습에 딱 1년만 지원해주기로 합의점을 찾았다. 혹 입시에 실패한다면 ‘재수는 없다’는 비정한 조건도 하나 내 걸린 채였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는 ‘너무 늦었다’, ‘대학 가기엔 힘들다’는 부정의 말들을 늘어놓았지만, 박 교수는 춤을 출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기회라 여겼다.
“늦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할 수 있었죠. 내가 정말 좋아 하는 일임을 가족들에게 또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어떤 수단으로서의 춤이 아니라, 춤이 곧 제가 걷고자 하는 길의 지향점임을요. 그렇게 숙명여대에 진학, 현대무용을 전공했어요. 춤에 미쳐 살던 4년의 대학시절이었죠.”
그 시절에 접한 것이 바로 재즈댄스다. 박 교수는 재즈와의 만남에서 그간 춤을 추며 고민했던 부분에 있어 답을 찾은 것만 같았다. 뭔가 예술은 심오해야 하고, 왠지 있어 보여야만 하는 온갖 ‘포장’을 쫙 벗어버린 느낌. 그의 춤이 직설적으로 변화한 이유이기도 하다.
“재즈댄스에는 흑인들의 한이 서려있죠.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 뭔가를 갈망하는 동작들이 많아요. 아픔과 상처, 기다림 등의 메시지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도 재즈댄스라고 생각합니다. 제 작품엔 재즈뿐 아니라 팝핀과 힙합 및 한국·현대 무용 등 다양한 춤의 장르가 나오지만, 늘 하이라이트는 재즈댄스가 차지하죠. 그 무엇보다 재즈댄스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재즈댄스에 폭 빠져있을 때, 그는 서울 생활을 접고 광주로 내려오게 된다. IMF로 가세가 기울면서 부모님을 도와야 했기 때문이다.
2년여 간 일절 춤은 추지 못하고 아동복 매장에서 옷을 팔았다. 광주 밀리오레에 입점해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가게를 운영했다. 장사는 잘 됐지만 말 그대로 고역이었다. 댄서로 드넓은 홀 구석구석을 쓸고 다녔던 그였기에, 좁은 점포에 갇혀 지내는 일이 고난 그 자체였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후, 가정 경제가 정상화 되면서 다시 무용수로서의 삶을 되찾았죠. 아동복을 팔았던 밀리오레 그 건물에 ‘조이재즈’란 이름의 센터를 오픈한 것입니다. 하루에 세 개 클래스를 운영했는데 40~50명이 꽉꽉 들어찰 정도로 인기를 끌었죠. 그때부터 일반인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실용무용을 알리는 데 주력해 온 것 같아요.”
그의 학원은 전공자들을 위한 클래스가 아니라, ‘헬스클럽’ 가듯 춤을 배울 수 있는 열린 공간 이었다.
입소문을 타고 춤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늘었고, 이후 힙합과 팝핀, 나이트댄스 등 다양한 장르의 춤을 아우르는 ‘조이댄스’로 확장, 운영했다. 이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외부 강의를 도맡았고 2005년 송원대와의 연을 시작으로 2010년에 임용됐다.
본격적으로 교단에 서면서 그의 교육관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학원에서는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들과 기술적인 면들을 전수하는데 초점을 뒀다면, 대학에서는 춤에 다양한 시각과 사고를 녹여내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학생들과 마주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작품이 댄스뮤지컬 ‘WE ARE:우리는’과 야외공연으로 선보인 ‘광주를 바라보다’ 등이다.
“금남공원에서 펼친 ‘광주를 바라보다’는 5·18 그 정신을 다뤘습니다. 역사적인 진실 묘사보다는 여전히 살아 숨쉬는 오월정신을 소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고 있죠. 근사한 무대도, 조명도 없이 버스킹할 때 쓰는 스피커 두 대를 놓고 공연했어요. 어떤 치장보다는 몸의 언어에 집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에게 춤은 또 하나의 언어다. 말로, 글로 제 생각을 표현한다면 그 자신에겐 ‘춤’이란 무기가 하나 더 있는 것과 다름 아니다. “말하고 싶은 게 곧 춤”이라는 그에게 확고한 철학같은 것들이 엿보인다. 때문에 그의 작품엔 경계가 없다. 국악, 팝페라, 뮤지컬과의 컬래버레이션이 이뤄졌고, 앞으로는 영상미디어와의 협업을 계획하고 있다.
후반기에는 작품 제작을 위한 밑 작업에 충실할 생각이다. 우선 그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광주에 숨어있는 인물들이다. 임방울 선생이나 양림의 선교사들의 삶의 행적들을 열심히 공부 중이다. 뮤지컬로 풀어낸 ‘세종대왕’, 윤동주의 삶을 다룬 ‘달을 쏘다’ 처럼 인물의 삶을 춤으로 풀어내 보고 싶은 마음이다. 두 번째 관심사는 ‘환경’이다. 작품 제목은 이미 ‘공존’으로 정해졌다.
간절한 바람은 두 가지다. 하나는 어린아이부터 실버세대까지 춤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판들이 펼쳐지는 것이다.
“꼭 춤이 아니더라도 삶의 활력을 선사하는 예술장르 하나쯤은 일상과 동행할 수 있었으면 해요. 현재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많은 사회문제들의 해답은 예술에 있다고 봅니다. 올바르게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방법, 숨통을 틔게 하는 무기들이 꼭 필요한 이유죠.”
또 하나는 시에서 운영하는 ‘실용무용단’이 탄생하는 일이다. 쉽지 않겠지만 “꼭 이뤄지길 바라는 것”이라 덧붙인다.
“광주엔 전국에서 최초로 충장로 케이팝스타의 거리가 조성됐어요. 그만큼 인재들을 많이 배출했다는 반증이죠. 우리 지역에 무용 인재들은 차고 넘칩니다. 이렇게 잘 성장한 아이들이 졸업을 하고 춤을 출 곳이 없어 모두 서울로 떠나고 있으니 안타깝죠. 젊은 춤꾼들이 마음껏 춤을 출 수 있는 시립실용무용단이 생기면 더할 나위 없겠죠. 광주의 전문 인력들을 잘 품어낼 수 있도록요.”